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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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만나다..

ordinary 2009/08/03 13:00
새로 개통된 9호선 라인으로 오면 출근시간이 30여분 가까이 단축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선릉역 방향의 2호선을 고집한 것은 환승의 불편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미의 이름 이후 오랜만에 다시 집어든 소설 한권.. 그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을 벌 수 있는 길은 오전 출근 시간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책을 가방에 집어 넣고 버스에 올라탄 후 당산역에 내려 2호선으로 옮겨탔다..

지하철은 자신의 본분이 땅 밑을 달리는 것임을 승객에게 다시한번 주지시키듯이 바로 지하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이윽고 열차는 영등포구청역에 도착했다.. 정차하는 바퀴소리가 플랫폼에 공명을 일으키는 순간, 출입문이 열리는 것을 무심코 바라본 것은 정말 무심한 선택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 생각없이 부산하게 환승을 하는 승객들을 지켜보던 그 때.. 눈에 들어오는 사람 한명..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 다시 확인해 보고 내 시력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곤 1년도 훨씬 더 지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녀다..

그녀의 모습을 처음으로 기억하게 된 것은 2007년 늦 겨울 즈음이었다.. 처음엔 인지하지 못했지만 동 시간대에 출근하고 방향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론 언제나 그 시간대엔 항상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녀에 대한 개인소사는 전혀 알 길이 없었지만 딱히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그 시간 그 자리에 그녀가 있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뒤 개인사정에 의해 회사를 옮기게 되고 거의 1년 여가 지날 수록 부딪히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더운 여름엔 그리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옅은 브라운 컬러의 플래어 스커트.. 다행히 객차 내의 에어콘 바람이 실내의 기온을 떨어뜨려 그 스커트의 색감이 그리 더워보이진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그 공간에서 나란히 서있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나갔구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던 사이 열차는 어느새 강남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고 열리는 문 사이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빠져나갔다.. 닫히는 문의 창문 사이로 계단을 향해 이동하는 모습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지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던 내가 그 순간 그 생각을 문득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의미없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날 때면 언제나 습관처럼 했던 그 행동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 주머니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바라봤다..

젠장.. 오늘도.. 지각이네..
2009/08/03 13:00 2009/08/03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