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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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에 사서 신고 다닌 스니커즈 신발끈 묶는 끝자락에 작은 구멍이 한쌍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신발끈 묶는 방식으로는 이 구멍의 용도가 묘연했다..
스니커즈를 샀을 때도 구멍이 쓰이지 않고 있어 더욱 그러했는데 특별히 신고 다니는데 불편함을 주진 않아서 사용하지 않은 채 1년이 지났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새로운 스니커즈를 사게 되었는데 이 스니커즈의 신발끈 묶는 방식이 내가 아는 방식이 아니었다.. 끈 묶는 방식이 새롭기도 했거니와 나름 신선한 방식이어서 예전에 신고 다니던 그 스니커즈에 오늘 적용해 봤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신발끈을 묶어 보고서야 1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아니 사용하지 못했던 구멍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이 사실로 깨닫게 된 몇가지..


첫번째, 가능한 다양한 경험을 겪어 보는게 좋다.. 그 경험이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기존의 누적된 경험과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꾸준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야한다는 전제는 기본으로..

두번째, 자신이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지식이 새로운 시도를 막는 제약이 될 수 있다는 점.. 
내가 아는 신발끈 묶는 방식의 지식의 깊이가 얕았기 때문에 그 구멍의 올바른 용도를 찾기까지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이 나에게 자산인지 제약인지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중요한 요소는 본질이다..
스니커즈의 구멍은 신발끈 묶는 방식에 대한 지식이 많은 이에겐 유용했겠지만 그걸 몰랐다고 해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 구멍은 신발에게 있어 부가적인 기능성이었지 신발의 본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질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에 따르는 기능성은 그 니즈가 생기는 순간 빛을 발하는 순간이 결국은 온다..
2015/08/25 23:17 2015/08/25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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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my notes 2008/11/07 19:22
본질을 발견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그 무언가에게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핵심이 되는 요소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핵심에 다가가기 위한 최단 경로를 모색하는 것이 바로 본질을 발견하는 행동이다.. 최단 경로를 찾는 순간 그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 할 수 있고 이것은 바로 효율적인 접근방법으로 집결되어 주어진 문제에 대한 가장 빠른 해결책을 제공하는 알고리즘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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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flickr.com/photos/67233922@N00/191192638/sizes/m/


2008/11/07 19:22 2008/11/0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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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 출시된 제품의 디자인이나 인테리어 등의 트랜드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가 바로 미니멀리즘이란 말이다.. 주로 장식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절제된 형태로 유지시키는 사조를 통칭하여 미니멀리즘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미니멀리즘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 미국 미술계에 새로이 등장했던 일련의 시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60년대 미국 미술계에는 기존의 미술계에서 보지 못했던 특정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가 등장한다.. 칼 안드레(Carl Andre), 솔 르윗(Sol LeWitt), 도널드 저드(Donald Judd) 등으로 대표되는 작가들의 시도는 당대 평론가들에 의해 대안미술, 저항미술 등으로 불리우다가 결국 미니멀리즘이라는 명칭으로 최종 축약되어 정리되게 된다..

기존 회화가 캔버스라는 2차원 평면에 가상으로 3차원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일종의 환영을 만들었던 것이라 여기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성격으로 등장한 미니멀리즘은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3차원의 형태를 표현하는 것은 그 형태의 모사일뿐 실제(實際)가 아니라는 점을 중시하고 결국 표현하는 방법이 실재(實在)하는 존재로서 다가서야 한다는 점을 중요시한 사조이다. 이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미니멀리즘은 reality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Carl Andre, Equivalent VIII, 1966

Carl Andre, Equivalent VIII, 1966

reality를 추구했음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품의 재료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주로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들이었는데 특히 이미 생산되어진(ready made) 기성제품들을 사용했다는 점-물론 모든 작가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을 주목할 수 있다.. 칼 안드레가 벽돌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표현한 것이나 댄 플래빈(Dan Flavin)이 형광등을 벽에 설치하여 작품을 만들었던 것에서 그런 부분을 볼 수 있다..

초기 미니멀리즘을 표현한 작품들의 공통점에서 주로 단순성, 기하학적 측면 만을 주목하고 이를 부각시켜 타 산업분야에서 미니멀리즘에 대한 적용의 폭을 넓혀 나갔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술계에서의 미니멀리즘과 타 분야에서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해석과 활용이 다른 양태로 보여지게 된다.. 결국 타 분야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해석은 단순, 기하학적 관점에서 보여지는 면이 강하며 초기 미술계에서 나타났던 형태의 미니멀리즘이 가진 의미(리얼리티라는 본질을 찾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던)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미니멀리즘의 최근 경향은 주로 기능성을 중요시 하는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기능성의 강화를 위해 장식적 요소를 최소화하는 절제의 형태로 보여지는 즉, 미니멀(minimal) 적인 부분을 좀더 특화하여 바라보는 시선으로 집중하고 있다.. 결국 초기 미니멀리즘이 찾고자 했던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미니멀리즘의 본질이 바뀌어 버린 결과가 되버린 것이다.. 어찌보면 본질에 대한 정의를 본질 스스로 규정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2007/06/15 01:49 2007/06/15 01:49
본질이 가지고 있는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피상적으로만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면서도 우려되는 행동이다.. 이 시도가 위험한 이유 중 하나는 본질이 내포하고 있는 원래 의도조차도 피상적인 부분만 남겨져 원래의 의도가 희석된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자.. 한 때 블로고스피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된장녀라는 말이 있다.. 초기에 이 단어가 의미하던 것은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를 하고 돈만 밝히는 개념없는 여성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한 된장녀의 표본적 대명사로 '스타벅스 커피'를 포함한 대표적인 대상들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비난을 받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단순히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된장녀가 되는 것으로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가끔 블로고스피어를 돌아다니며 올린 글들을 보다 보면 '자신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만 된장녀는 아니다'라는 변명아닌 변명을 올리는 블로거들을 보게된다.. 물론 스타벅스 커피가 상당부분 된장녀와 동일시되는 의미로 대중에게 전달이 되었던 영향이 제일 크겠지만 된장녀라는 단어가 가진 본질의 의미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된장녀와 스타벅스 커피와의 관계 또한 그러한 연관관계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되짚어 생각하는 이들은 우선 겉으로는 적어 보인다.. 그러기에 위 블로거의 예처럼 굳이 자신이 된장녀가 아님을 말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의 의미가 희석된 관계로 변명을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가끔씩 사회가 점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는 목적 하에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만 해석을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빠른 판단과 의사결정이 중요시되는 현대에 있어서 본질의 깊은 부분의 의미까지 짚어가며 의미를 풀어나간다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기준이라는 것은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 부터 시작된다.. 어떤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정답은 과연 그 본질이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부터 시작된다.. 피상적인 해석만으로는 결코 그 근원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다..
2006/11/27 18:22 2006/11/27 18:22